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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풍성한 삶의 기초 첫번째 만남 -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축복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스인이라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한다는 의미는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표현에 멋침거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김형국 목사의 "풍성한 삶의 기초" (비아토르)의 12번째 만남을 통해서 풍성히 얻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풍성히 얻다는 풍부하게 산다라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풍성한 삶의 기초는 책과 함께 워크북이 딸려온다. 왼쪽은 책, 오른쪽은 워크북이다. 워크북에는 질문들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사용한다.

 

첫번째 만남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나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그 안에는 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마다 내리는 의사 결정이 주인을 배제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인을 한 번이라도 인식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된다. 중세에 기사단 (Knight)을 왕이 임명할때, 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이 의례에 임한다. 나의 왕과 주인이라는 의식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다니면서 맡겨진 임무에 충성을 다한다. 그것이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몇십전만해도 한국에 가짜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수업도 같이 듣고, 시험도 보며, MT도 같이 다니는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대학생들이었다. 미국에도 이러한 가짜 대학생들이 있다. 델라웨어주 출신의 애덤 윌러는 위조된 문서로 하버드 대학에 편입을 한 케이스가 있다. 그는 이 뿐만 아니라 하버드 재학 중 가짜 서류로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의 가짜 대학생 신분은 탄로 나게 되었다. 그는 절도, 신분증 위조, 학력 위조, 논문 표절 등 20개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문화적으로 비슷하고 겉모습도 비슷하지만, 이러한 가짜는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이러한 가짜의 문제는 출발점이 입학이라는 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입학... 크리스찬의 시작,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출발점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입학을 제대로 하였는가?

 

 

"영접 기도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접 기도의 내용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 - 이수용 목사

 

 

  만약 어느 누간가가 모태 신앙을 가졌다고 가정 해보자.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신앙적으로 가짜 대학생이 될 확률이 다분히 높다. 그 이유는 기독교라는 것이 문화적으로 흘러내리는 가정 환경과 교회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바로 기독교가 자연스레 표현되어 있는 환경에서 입학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모태 신앙의 단점만을 부곽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첫 단추가 내가 직접 끼지 않고 남이 끼워주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고 우리는 남들에게 묻고, 또한 남들에게로부터 물음을 받는다.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죽은 다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각 사람마다 구원에 대한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정의를 바르게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될때 가장 중요한 시작이다.

 

 

  또한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공사하다가 많은 인부들이 떨어져서 죽거나 다친 일화가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인부들이 자주 떨어지는 곳에 안전 그물을 장치하였더니, 떨어지는 인부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스토리이다. 구원의 확신은 이와 같다. 우리가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갈 때, 구원의 확신을 통해서 떨어지는 것에 대한 안전감을 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 자체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죄라는 개념은 단순한 도덕 개념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 김형국 목사

 

 

하나님이 가지신 공의의 성품으로 인해서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표현은 의미 전달이 약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다 죄값인 죽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인 사랑이 그냥 우리를 죽게 놔둘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를 대신해서 죽은 그 사람을 위해서 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고통을 준다. 때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행하여도 죄성으로 인해서, 또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더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일이 더 꼬일때가 있다. 이것은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최종 결론을 내릴 때 일어나는 오류 현상이다. 우리의 의사 결정은 항상 선택할 수 있는 것중 최고의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사 결정 자체가 내 인식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내 사고 자체에 문제가 있을 때는 결론 역시 잘못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어떠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사회와 문화 그리고 환경 오염 및 온실 가스의 문제는 이제 도덕적인 차원 혹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시작점을 다시 죄의 본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 잘하려고 할수록 더 꼬여버리는 이유

빨간색 선글라스를 썼을 때 시야에 보이는 물건들은 모두 빨간색이다. 빨간 우산, 빨간 모자 그리고 빨간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진다. 내가 알게 된 사실과 그로 인한 확증으로 인해 나의 의사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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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flix에 소개된 Seaspiracy 다큐먼트는 나에게 참 많은 여운을 안겨주었다. 바다의 오염을 막으려고 시작한 한 개인이 조금 더 시야를 넓혀서 이 문제를 바라보니 단순히 쓰레기 줍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시작 포인트이다. 결국,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물고기 포획량으로 인해 바다는 되돌아 갈 수 없을 만큼 망신창이 되어버렸다. 결국 작가가 결정한 것은 채식 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을 다시 자신으로 돌렸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결국 어떠한 정책도 이를 막기에 역부족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우리의 죄가 바로 이렇다. 도덕적 기준으로, 혹은 선한 행동으로 우리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고, 그를 위해서 예수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붕어빵처럼 공장에서 대량 생산을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나를 만들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 정, 의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 강아지를 보아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느낄을 수 있는 감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의지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나를 만들었을 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정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지정의를 가지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나를 비로소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주어진 상황과 태어날 때의 환경에 관계없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지 하고 노력하면 우리는 결국 악으로 국한될 수 밖에 없는 자기 중심적 사람이다. 하지만, 이 사랑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자존감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이들의 고백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 그리고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제 내 뜻대로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영향을 보여주게 된다. 내 행동이 바뀌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의 삶은 행동에서 분명 나타나게 되어있다.

 

 

누군가를 위해서 산다는 표현과 누구의 것이라는 표현은 의미가 다르다. 아내를 위해서 산다고 간혹, 남편들은 말한다. 이는 분명 그 남편이 설거지를 비롯하여 아내가 해야할 일들을 열심히 도와줄 경우 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아내와 싸운 후에는 설거지도 하기 싫고, 오늘은 빨래도 하기 싫을수 있다. 그때에는 나 이제 아내를 위해서 살지 않을래 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누구의 것, 나는 아내의 것이라고 할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내가 싫을때에도 짜증날때에도 나에게는 의사결정권이 없고, 아내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것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로마서 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표현은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보다 더 한차원 높은 고백이다

 

 

그러나, 여기에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내 삶을 돌아보니 예수님이 주인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말씀을 읽지만, 친구가 알려주는 새로운 정보에 혹 하여서 결정권 자체를 다시 예수님에게서 빼앗아온다. 순간순간 나는 바울의 기준에 못 미친다고 자괴감이 들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고민도 해본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탄의 참소 목소리이다.

 

 

즉,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들을 끝임없이 우리 생각 속에 넣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사탄이다. 이런 소리는 보통 "너같은 것이 어떻게 기독교인이냐?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보다도 더 못한 삶을 사는데." 이런 목소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소리에 단호히 대항해야 한다. 그래 난 모든 면에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아니 악하다고 하는 사람들보다도 내 깊은 곳에서 더 악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예수님이 필요하며,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히 고백해야 한다. 이러한 참소와 잘못된 생각 앞에서 뻔돌이가 되어보자. 뻔뻔하게 그리스도를 더 자랑하는 것이다.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은 12주 과정의 훈련이 마치지 않았어도, 그의 신분의 군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다.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과 같이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람이 완벽하게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군인이 된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 죄를 대신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마음으로 믿을때 이미 우리의 신분은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변한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레벨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일단 그 분을 주인이라 고백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계속 성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즉, 방향성을 똑바로 갖는 것이 중요하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간혹 신문을 보면 이런 사연들이 있다. 가난하고 인색했던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오는 엄청난 돈가방과 금 덩어리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데는 탁월했지만, 돈을 사용하는 법을 몰라서 평생 궁핍하게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도 싶다.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혜택과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혜택과 축복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이러한 외적인 모습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 별것없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때, 우리는 영적인 아버지를 찾은 것이다. 고아였던 내가 아버지를 찾았으니 얼마나 기쁜가?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버지가 재벌이셨다. 그래서 졸지에 재벌 2세가 내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재벌 2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과 축복은 유한한 돈과 달리 샘 솟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어주신다. 이러한 영적 축복을 발굴하고 탐험하는 것이 우리 아들 된 자들의 삶이다. 

 

 

당신의 연봉은 얼마인가요? 억대 연봉인가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직장과 일하는 것에 대한 댓가로 우리의 가치를 매기는데 익숙하다. 그런데, 우리는 억대 연봉보다 비싸다는 것을 잊고 산다. 하나님 자신,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와 목숨으로 우리를 억대 연봉자로 만들었다. 아니 그보다 상상도 못하는 백지 수표 연봉자로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남은 것은 이 백지 수표에 얼마를 적느냐만 남았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가치가 얼마인가? 그 가치를 백지 수표에 적고 우리는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나는 억대 연봉자라고

 

 

  이태원클라쓰에 나오는 명대사가 있다. "당신이 무엇인데, 나의 가치를 결정하냐? 내 가치는 내가 결정한다." 참 멋진 대사이다. 그렇다. 나의 가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나의 가치를 판단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목숨값으로 우리를 살리셨다. 그 아들의 목숨 값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첫만남 에필로그

 

  나는 아이들에게 자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매달려 죽은 도둑을 예로 든다. 그들은 교회도 못가고, 헌금도 못했으며, 선교라는 것은 뭔지도 모를 뿐더러, 성도의 교제의 기쁨 또한 체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땅에서는 최고의 악을 저질러 예수님과 나란히 죽임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 도둑들 중 한 명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허락해주셨다. 결국 사형 받는 사람의 죄값과 구원과는 별개라는 것을 확실히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와 함께 나는 “착한” 혹은 “good” 이라는 단어를 조심하라고 아이들에게 경고한다. 특히, 선과 악을 분명히 나눠서 보여주는 TV 드라마, 혹은 애니메이션들을 더 조심스럽게 경고한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반으로 나눠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대부분 희석시키고 한쪽만이 옳다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선이 항상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절대 선이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에 인간이 생각하는 선으로 해피엔딩을 이룰 수 있다는 착오를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결국 사람이 착하고, 선한 것은 우리의 구원의 기준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의 특징으로 선함과 착함이 나올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이 포스팅은 김형국 목사의 풍성한 삶의 기초 (비아토르)의 책과 이수용 목사의 일대일 제자 양육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린다.

 

 

두번째 만남은 성경적 믿음의 원리에 관해서이다.

 

풍성한 삶의 기초 두번째 만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생에서 배운 교훈들로 인해 우리는 인격이 성숙한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또한 성령님을 더욱 체험하고, 말씀의 묵상이 깊어지면 우리의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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