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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풍성한 삶의 기초 일곱번째 만남 - 형제 사랑을 살아내는 공동체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살리신 귀중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 법칙은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 즉 공동체를 발견하게 된다. 일곱번째 만남에서는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지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형제 사랑을 살아내는 공동체

 

1.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공동체

나만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내 신앙만 지키면 안될까? 교회 안에서의 다툼과 시기 질투는 내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이러한 질문들은 간혹 우리는 듣는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러한 공동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얘기하고 있는가? 

 

 

에베소서2: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나에서 이제 성경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작품은 헬라어로 포이에마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형이다. 즉, 우리라는 공동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수록 성화의 과정 가운데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나에서 우리라는 관점이 전환이다. 나 밖에 모르던 내가 나에서 시선을 옮겨서 다른 영혼들을 바랄 볼때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 속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결국 더 넓은 시야로 공동체를 바라본다면, 이 믿음의 공동체속의 각각의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만 볼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서 함께 찬양과 경배를 드릴 특별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적인 인격과 성품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그 많은 일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바라보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지 우리는 아직도 세상의 욕망들과 육신의 정욕을 끊임없이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신분은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 같아서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변환되었지만 (하늘의 시민권자로) 우리의 옛모습은 아직 우리안에 깊이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전한 인간들이 모인 그룹이 교회 구성원이 될 수 밖에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에서 하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공동체 안에서 서로 보이면서 성화되는 과정은 우리에게 필요한 단계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흔히들 상처받았다는 얘기를 하지만, 사실 교회보다 어떠한 공동체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교회에서 다툼이 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의사결정에서의 충돌, 시기와 질투로 인한 싸움, 이기심으로 만들어진 어그러진 사랑,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신앙 등등은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유대인은 기본적은 이방인과 섞이지 않았다. 어떠한 사회적인 관계, 특별히 신앙에 관련해서는 아주 물과 기름처럼 차별화 두었던 민족이다. 그런데, 그러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고 생각해보자. 조선 시대에 양반과 노비가 같이 일요일마다 만나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초대 교회 공동체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2.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기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불가원불가근 (가까이도 접근하지도 말고 멀지도 않게)의 원칙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문제가 있을 만한 토픽에서 가능하면 멀리 떨어지려고 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제 자체를 만들기 않기 원한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위해서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당신의 기준점은 어디인가? 나는 그 기준점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교회를 자기의 몸이라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이다. 교회에서의 하나됨은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를 이룬다는 접근방법보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띠로 인해 하나의 띠로 우리가 묶여졌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노력으로의 하나됨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되어져 가는 것이다. 독특하고 세상에서 모난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인 공동체, 교회에서는 우리의 인간적인 공통분모 (학벌, 인적, 취미, 성별)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공동체를 빚어가야 한다. 

 

 

피아노의 건반은 총 88개이지만, 이 소리를 내기 위해서 약 220개의 현이 있다고 한다. 이 현들이 제멋대로 소리를 내면 소음이 되는 반면, 조화롭게 소리를 내면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재현할 수 있다. 피아노를 조율할 때 가장 중앙의 A음을 기준으로 한다. 이 기준점으로 다른 현들은 자신의 현을 조정한다. 그리스도는 공동체 가운데 A음이다. 우리가 A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A라는 기준으로 맞춰나갈때 모두가 같이 조화로운 예술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 다르다. 측은지심, 즉 불쌍한 마음에서 비롯된 자비의 사랑은 다른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사랑은 특별하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차원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없고 죄로부터 허덕이는 나를 위해서 예수가 대신 죽었고, 그로 이해서 내가 죄씼음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근원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즉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 사랑은 단순히 측은지심의 차원이 아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태) 에서 사랑으로 용서받은 힘으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

교회만큼 여러가지 이슈들로 시끄러운 곳도 없지만, 교회만큼 사랑 전문가가 넘쳐나는 곳도 없다. 완벽한 교회란 설교를 감동적으로 하는 목회자, 성도를 물심양면으로 돌보는 성도들, 그리고 멋진 교회 건물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완벽한 교회를 찾았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교회에 당신이 등록하는 순간, 그 교회는 더 이상 완벽한 교회가 되지 않는다. 바로 당신, 그리고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도 우리의 성품의 변화가 더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아직 그리스도를 알기 전인 사람들도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주 당연히 교회는 시끄러운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분명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에서 사랑 전문가들이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사랑 전문 연구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라는 통로로 이어져간다. 그것이 바로 당신,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를 알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 누군가의 사랑 전문가가로 인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서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다. (혹은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희생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바로 다른 사랑의 유익을 위한 희생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희생을 한 것이다. 

 

 

2021.12.11 - [예수 그리스도] - 풍성한 삶의 기초 여덟번째 만남 - 섬김의 도를 실현하는 공동체

 

 

이 포스팅은 김형국 목사의 풍성한 삶의 기초 (비아토르)의 책과 이수용 목사의 일대일 제자 양육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