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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불가항력적인 은혜 (Irresistible Grace)와 자유 의지 (Free Will)

자유 의지는 우리의 인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결정권을 의미하지 않는다

 

11: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11: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11:1 Now the leaders of the people settled in Jerusalem, and the rest of the people cast lots to bring one out of every ten to live in Jerusalem, the holy city, while the remaining nine were to stay in their own towns.
11:2 The people commended all the men who volunteered to live in Jerusalem.

 

 

느헤미야를 선두로 재건된 예루살렘 성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이 발생한다. 백성들이 다함께 예루살렘 안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 그리고 나머지는 제비뽑기를 해서 열명 한명만 예루살렘에 들어가 살기로 한다. 이런 일이 생긴걸까? 이들은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괜찮았지만, 피폐한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기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140 동안 예루살렘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 성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이를 싫었던 것이다. 지도자들은 어차피 백성들에게 녹을 받았기 때문에 억지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고 해도, 백성들에게는 이를 거부할 자유 의지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강권적인 이주를 하게 하신다. 제비뽑기를 통해서 강제적으로 백성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이렇게 제비 뽑혀 들어간 백성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아마도 인상을 쓰면서 마지 못해 성안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성경은 이를 자원하여 (Volunteered) 성안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강권적인 이주와 자원하는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제비 뽑혀 억지로 들어온 사람들을 뒤에서 박수 쳐주며, 그래 너희들이 자원하여 이렇게 왔구나 하고 칭찬해주며, 인정해주신다는 것이다. 제비로 인해 의무적으로 거주하게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였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구원과 연결시켜보자. 구원은 나의 의지와 행위, 그리고 노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의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심 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이 대하시듯 그래, 했어 수고했어 라고 칭찬해주신다는 것이다.

 

디도서 3: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씼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것을 신학적인 표현으로 불가항력적인 은혜 (Irresistible Grace) 한다. 이것은 내가 거절하거나 거부할 없다는 의미이다. 내가 피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나를 크게 덮어버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를 구원의 자리에 앉혀 놓고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이고 잘했어. 아주 수고했어.” 억지로 들어간 , 열광적인 박수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이를 축구 경기로 비유해보면 다음과 같다. 축구를 하나도 모르는 나를 최전방 센터 포드에 데려다 놓고, 멀리서 하나님께서 열심을 골을 몰고 공을 차서 머리에 정확히 마쳐서 이것이 골이 되게끔 하는 . 이것이 구원인 것이다. 나는 어디에 서있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내가 왜 축구장에 있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메시와 같은 선수야. 호날두와 같은 선수야 라고.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으로 만들어낸 작품.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구원이 현실적으로 우리 쪽에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는다면, 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자유 의지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인가? 이를 위해 이해하기 위해 예정론과 운명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운명론 (Fatalism) 인생의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이론이다. 인생의 모든 과정, 순간 순간이 이미 정해져있다. 마치 장난감 자동차의 태엽을 돌려서, 선로에 놓을 경우 태엽이 풀릴 때까지 정해진 선로안에서만 달리는 것을 운명론이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운명론으로 우리 인생을 정해놓았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예정론 (doctrine of Predestination) 하나님께서 지성과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셔서 사람을 목표까지 열심을 가지고 이끌어 나가는 것이 예정론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목표를 가지고 이를 끌고 가신다면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자유 의지는 우리의 인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결정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인가를 결정해도 미래의 운명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게 정해진 골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골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지식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때론 어려움에 처했을 지식으로 이를 피해가려고 하며 감정적으로 이해하여 의지적으로 이를 해결해 나간다. 마치 불이 났을 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만나는 불과 같은 이벤트에서 우리가 지성으로 스스로 깨닫고, 감정으로 이해하여 의지적으로 길에서 돌아서게 해주셨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 의지이다.

 

 

자유 의지는 맘대로 살아도 된다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의 의미로는 맘대로 살아도 구원 받은 자는 구원을 빼았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분명 불구덩이로 가득찬 죄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질 있다. 하지만, 불구덩이에서 다시 나와 태초 전에 계획하신 방향으로 우리의 자유 의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끌고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목표한 최정 결승점에서 인간이 이탈했을 바로 픽업해서 자리로 돌려 놓지 않으신다. 분은 우리의 지정의를 통해 스스로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데 나의 의지로 그것을 선택하는 . 이것이 자유 의지이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고 나서 우리가 고백할 있는 것이 있다.

 

이제는 인생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붙들고 가고 있다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을 있는 여러가지 기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분명 우리를 알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이다.

 

 

이 포스팅은 한몸 교회 이수용 목사의 예정론에 대한 부분을 내 버전으로 옮긴 것임을 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