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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이 육신 되었다는 의미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없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육신 우리가 생각하는 육체, 몸과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어에서는 이를 sarx (사륵스)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 1:1418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16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육체, 육신를 표현하는 단어가 성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두가지를 찾아볼 있다.

 

소마: 인격적 구성체, 긍정적

사륵스: 육체적 연약성, 죄성, 부정적으로 자주 표현된다

 

 

고린도전서 6 20

값으로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사용했던 단어는 지정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라고 사용되었다. , Somati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나온 육신은 이와 다르게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긍정적인 , 육신의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8:6 나오는 육신이다 (sarkos).

 

 

로마서 8 6

육신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요한 사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했을 , 이에 내포된 깊은 뜻이 있다. 숭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더럽고 추악한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깨끗하고 정결하며, 거룩하신 분이, 더럽고 추하고 죄성으로 가득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착한 의도에서 사람들은 빈민촌에 들어가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감내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삿대질 당하고, 매질을 받기 위해서 어려운 환경으로 일부러 환경을 만들지는 않는다. , 자신의 한계 가운데 도울 있는 만큼을 도와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구지 더럽고, 추하고,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셨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이러한 육신을 벗어버린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것도 의미를 알면 놀랍지만, 우리 안에 거한다라는 것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skenoo 라는 단어는 텐트를 치다라는 뜻이다. ,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아닌, 우리와 가까이, 정확하게는 우리 안에 아예 들어와서 텐트를 쳐버리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에게 명령을 하셔도 되었을텐데,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까? 그것은 우리가 틈만 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자신을 우리와 연합시켜버렸다. 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가는 때까지 결코 우리를 놓치 않기 위해 자신을 우리와 꽁꽁 묶어버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갈라디아서 2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죄가 우리에게 엄습해올 우리가 기억해야할 2가지 사실이 있다.

 

첫번째는 죄를 지을 아무도 모르는 같지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이를 알고 있다. 내가 보는 , 내가 만지는 .. 이것을 같이 하게 된다. 이상 혼자 몰래 짓는 죄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거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듯이 역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우리가 드는 의문이 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와서 자신과 나를 꽁꽁 묵었는데, 나는 죄를 향해 계속 달려나가게 되는 것일까?

 

내가 죄를 지을려고 나를 막아주면 안되는가? 가던 차가 멈추던지,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초자연적인 힘이 나를 죄에서 멀리하게 거주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면 안되는가?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거주하고 계신것인가? 라고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게 되면 교회 조차 가기 싫어지게 된다. ,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합리적인 의심이다.

 

 

이 포스팅은 한몸교회 이수용 목사의 설교를 나의 버전으로 재해석 했음을 알려드린다.